처음으로 이윤이 귀를 만났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윤이가 아버지를 만났다. 박제되어 10년동안 죽어도 죽지 못한 아버지 사동세자... 아버지의 그렇게 박제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윤은 그냥 이 모든것이 슬프다. 10년전 그 어린 아이가 이제는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이렇게 만났다. 그때 우물안에서 아버지를 꺼낼 수 없듯이 이윤은 매달려 있는 아버지를 내려줄 수 없다. 그 자괴감은 여전했다. 할아버지가 귀에게 인사를 드리라는 말이나 귀가 세손이 사동세자 보고 싶어 불렀다는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슬프면서도 현실감이 존재하지 않는 표정이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이윤에게는 사동세자만 보이는 듯 했다. 보통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 무너질 일이지만 윤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보다 더 한것도 견뎌왔으니깐. 오히려 도망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뜻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기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윤이를 보고 귀는 세손이 음란서생이냐고 묻자 이제까지 무력하게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하고 있던 이윤은 처음으로 예전의 이윤으로 돌아온다. 귀의 말에 비웃음을 날리며, 오히려 역으로 내가 음란서생이라는 증좌를 보여 달라 말한다. 증좌를 보여주고 날 죽이면 되지 않냐는 도발까지 함께 말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이윤이었다. 이윤을 흔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이라는걸 새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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